얼마 전에 모 TV 에서 본 것이다.
와인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TV 프로에 나와서 상표를 가린 와인들을 시음하고 나서 “이 와인은 어느 회사의 몇 년도 무슨 와인이다.” 라고 알아맞추는 프로였다. 많은 시청자들이 “야, 거 대단한 사람이다. 귀신같이 맞추네.” 라고 감탄하였다.
이런 프로를 본 사람들 중에서 여러 사람이 “이게 가능한 일이냐” 하고 물어왔던 기억이 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이점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전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와인의 상표를 가린 채 불쑥 내어 놓고 “어느 회사의, 몇 년도의, 어떤 제품” 인지 알아맞추라고 한다면, 맛만 봐서는 어느 누구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와인 강의를 할 때 자주 해본 질문이다. “지구상에는 몇 종류의 와인이 있나요?” 하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1만종, 어떤 사람은 100만종, 어떤 사람은 1억 종 등으로 답변을 한다. 여러분은 대략 몇 종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구상에는 매년 수백억 병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겠지만 정확히 그 종류를 아는 사람이 없다. 나라별로 또 지역별로 수많은 와인 공장이 있고 각 공장에서는 여러가지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한 해뿐만 아니라 이런 제품을 매년 생산하고 있다. 큰 와인 공장에서는 와인 탱크 하나에서 수만, 수십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 수만, 수십만 병의 와인은 한 탱크에 들어 있으므로 한 종류의 와인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물론 탱크의 아랫 부분과 윗 부분의 와인이 엄밀히 보면 같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와인이라고 생각하자. 이들 와인이 출하되고 유통 회사를 거쳐서 최종 소비자의 손에 도착하면 같은 종류의 와인은 많아야 한 두 상자 아니면 몇 병이 전부일 것이다.
만약 소장자가 이들 와인을 서로 다른 곳에 보관하면 그때부터는 보관 조건이 다르게 되고 이런 상태로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맛이 다르게 변하여 수만 병의 와인은 각각 다른 와인이 된다. 와인은 보관 조건이 달라지면 서로 다른 와인이 되기 때문에 공장에서 한 탱크의 와인을 같은 날 병에 담았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각각 다른 와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지구상의 모든 와인은 병에 따라 맛이 다 다를 수 있다.” 라는 결론을 얻게 될 것이다. 물론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 세계에는 수십만 개의 와인 공장이 있고 이들 공장에서는 매년 최소한 몇 가지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으니 매년 세계적으로 수백만 종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수많은 와인 중에서 자기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와인을 상표를 가린 채 내어 놓고 “맛만 보고 무슨 와인인지 알아맞추라” 고 한다면 무슨 수로 회사와 제품 이름을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무슨 귀신인가? 아니면 점쟁이인가? 알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혹시 한번 마셔본 와인을 내어 놓고 테스트를 한다고 하더라도 오래 전에 마신 와인라면 기억해내기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마셨던 와인은 그동안 맛이 변해 다른 와인이 되어있을 테니까. 뿐만 아니라 사람이 컴퓨터가 아닌 이상 오래전에 마신 와인의 맛과 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오래전이 아니고 바로 어제 마셔본 와인을 다시 테스트 한다면 조금은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도 와인의 맛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다든지 혹은 마시는 시간과 장소가 다르든지 또 맛보는 사람의 컨디션이 다르든지 하면 이 또한 불가능하다.
오래전에 외국의 TV 프로를 본 적이 있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약 10 종류의 와인을 미리 알려준 후 일정 기간을 주어서 시청자들이 그 와인 10종을 사다가 집에서 열심히 연습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정한 날에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 프로에 나와서 상표가 가려진 와인 10종을 맞추는 시합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시합을 하였으나 결국 다 맞추는 사람이 없었다. 와인을 미리 알려주고 시합을 하였으니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도 맞추지 못했다.
시합에서 사용한 와인과 시청자들이 구입해서 연습했던 와인은 같은 회사, 같은 제품, 같은 연도이나 보관 조건이 다 다르니, 시음 연습은 열심히 했지만 실제로는 다른 와인으로 연습한 셈이었고, 시음하던 장소와 시간, 그리고 본인의 컨디션이 다르니, 와인 맛이 다르게 느껴진 것이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소믈리에를 뽑는 시합에서도 "어떤 회사, 몇 년도의, 어떤 제품이냐?" 를 알아내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지역에서, 몇 년도에 생산된 와인이냐” 정도를 묻는다. 생산 지역도 대부분 프랑스에서 유명한 지역, 생산 연도도 최근 연도의 것에서 출제하고 있다.
프랑스의 A.O.C. 와인 약 500개를 각 생산 지역과 생산 연도와 회사 별로 맛을 다 보고 그 특징 등을 머리에 입력해 두고 있다가 이 와인들의 이름을 불러 오는 컴퓨터 같은 인간은 세상에 없다.
독자들도 앞으로 TV 에서 와인을 맛보고 척척 맞추는 프로를 보게 되면 “프로를 재미있게 하기 위하여 각본대로 하는 구나” 라고 생각하고 “와, 대단한 사람이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세상에 그런 귀신은 없다.
*필자 소개: 연세대 화공과 졸업, 미국 포도주 공장 연수(캘리포니아, 뉴욕 주), 독일 가이젠하임 포도주 대학에서 양조학 수학, 프랑스 보르도 소재 CAFA 와인스쿨 정규 소믈리에 과정 수료, 국산 와인 마주앙 개발 주역으로중앙대, 세종대 초빙교수 역임,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단국대, 기업체 등에서 와인 특강, 저서로 `와인, 알고 마시면 두배로 즐겁다(세종서적)` `와인 인사이클로피디아(세종서적)`, `와인 가이드(중앙북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