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기(정신과 전문의)  http://blog.naver.com/artppper   죽은 후에 천국 혹은 지옥에 간다거나, 윤회가 되풀이 된다는 것은 가장 대표적인 죽음에 대한 사상이다. 과거 종교에서의 사후 세계에 대한 생각은 대동소이하다.   불교에서는 업보에 따라서 윤회가 되풀이된다고 본다. 사후에 다른 인간, 다른 동물의 형태로 변신해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읽다 보면 사람이 죽어서 동물이나 식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리스인들의 변신과 불교의 윤회의 차이는 그 것이 일회성이냐 반복되느냐인 것 같다.   힌두교의 사상에서도 윤회는 나온다. 크리슈나는 계속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전생이 존재한다. 기독교적 사상도 부활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후의 영원한 삶을 꿈꾼다.   결국 보통 사람들이 사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인 것 같다.   첫째, 죽은 후에 다른 인간 혹은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그것은 불교에서와 같이 반복될 수도 있고, 그리스 신화처럼 일회성 변신일 수도 있다. 영의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는 기독교적인 관점도 변신이라는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보통 사람들이 마음속에 가지는 가장 소박한 방식인데 현재의 나의 형태로 살아가게 되는 사후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 형태가 죽기 전의 비참한 모습이 아니고 나의 가장 좋고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이승에서 내가 사랑하던 이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물론 내가 미워하고, 나를 괴롭히던 이들은 없었으면 한다. 혹시 있더라도 그들이 착해져 있기를 바란다. 유령, 혼령도 이러한 관점의 변형된 형태다.   마지막으로, 산업혁명 이후 널리 퍼져가고 있는 관점인데 사후세계는 없다는 것이다. 용감하게 죽음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이라는 실존주의적인 관점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에서 약간은 비켜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도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개인적 체험`을 보면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나온다. 그녀는 불행한 개인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환상 속에서 산다. 굳이 진단을 한다면 magical thinking(마술적 사고)를 지닌 Schizotypal personality disorder(분열형 인격장애) 라고나 할까. 어쩌면 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 일 수도 있다. 그녀는 지구에서의 삶이 끝나면 다른 별에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수개의 별에서 모든 과정을 거치면 그 때는 더 이상 고통스러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사후 세계는 다른 별에서의 삶인 점이다. 우주에 대한 지식이 커지면서 생긴 사후세계 관이라고나 할까.   리처드 바크의 `환상`이라는 소설을 보면  메시아가 주인공에게 왜 사람이 불행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는 극장에 들어설 때 항상 아름다운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다. 액션영화를 볼 때도 있고 공포영화를 볼 때도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이 스스로 원해서 공포영화를 보듯이, 인간도 자신의 삶을 선택할 때 괴롭고 추한 삶을 선택하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면 로맨스, 공포, 예술, 액션 영화중 하나를 선택하듯이, 우리가 매번 죽고 다시 태어날 때마다 인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윤회는 이번 생에서 어떤 삶을 살았냐에 따라서 나의 다음 삶이 결정된다. 인과응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리처드 바크의 생사관은 보다 능동적이다. 내 다음 삶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은 실로 독특한 시간관을 선보인다. 여러개의 삶이 동시에 진행한다. 지구에서의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삶이 진행되는 동시에, 다른 별에 납치된 주인공은 관찰용 시설에 갖혀서 지낸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과 다른 점은 동시성 여부에 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 여주인공은 한 별에서 죽으면 그 다음별로, 그 별에서 죽으면 또 그 다음별로 옮겨 다닌다. 반면에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서는 동시에 여러 개의 삶이 진행된다. 내가 지구에서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 또 다른 별의 나는 엄청난 쾌락과 희열 속에 살아갈 수도 있다. 커트 보네커트는 2차 세계대전 때 참전해서 전쟁의 끔찍한 참상을 보면서 이러한 시간관을 떠올리게 된 것 같다.   일부 현대 물리학자들의 시간관도 독특하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어떤 특정한 공간, 특정한 순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일이 현재가 되고, 그것이 미래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시간관이다. 하지만 현재의 일이 과거에 영향을 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것이 기적일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다. 기도를 해서 암이 치유된다. 현대과학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 진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암에 걸렸다. 어떤 존재가 암세포가 처음 생겨난 시점에 개입을 해서 암 자체가 발생하지 않게 한다. 그것을 사람들은 암이 치유되었다고 표현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기억 자체도 확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과거도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미래가 진행됨에 따라서 항상 다른 과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간관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없어진다. 결정론적인 죽음관을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과거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나의 1시간 전의 과거는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하지만 나는 1시간 전의 과거를 기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다시 바뀐 1시간 전의 과거를 기억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 시간 후에는 바뀌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간관은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한 현대사회에 부합한다. 사람들은 흔히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서 점쟁이를 찾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점쟁이들이 과거는 잘 맞추는데 미래에 대해서는 틀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점쟁이들은 당신의 현재가 미래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간다면 당신의 현재가 과거를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아울러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미래의 모습이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송두리째 바꾸고 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때때로 이런 상황을 꿈꾼다. 방금 나는 한 인생을 마쳤다. 나는 내 평생을 돌아본다. 마치 영화감독이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듯이 나는 내 인생을 꼼꼼히 본다. 그 안에는 나를 눈물 흘리게 하는 장면도 있고, 나를 부끄럽게 하는 장면도 있다. 내 인생을 다 본 후에 나는 이제 새로운 삶을 선택해야 한다. 과거의 삶에서 나는 너무 꿈을 좇으면서 살았다. 이번 삶에서는 더 현실적인 사람이 돼야지 하고 선택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반대일 수도 있다. 과거의 삶에서 나는 너무 외향적이고 금전적인 면에만 신경쓰면서 살았다. 그래서 이번 삶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하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는 고유한 존재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한 나의 바람에 따라서 나는 이번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기에 제일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환경을 골라서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바라본다면 나의 삶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저승에서 의도한 바 대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타고난 본성 때문에 내 의도와 다르게 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어쩌면 내 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감독이나 제작자의 의도나 예상과는 다르게 성공적인 영화도 있기 때문이다. 내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내가 이번 삶을 마치고 저승에서 감상할 때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만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필자 소개:  부여다사랑병원 원장,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보건학과에서 병원경영 강의, 저서는 <심리학 테라피>, <병원이 경영을 만나다> 등.    
최종편집: 2025-05-02 03:3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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