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기(정신과 전문의) http://blog.naver.com/artppper
배신을 당하고 나면 사람이 무서워진다. 애인이 양다리를 걸치고 있거나 배우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믿었던 사람에게 돈을 떼어먹히면 돈도 돈이지만 사람을 잃었다는 것이 큰 상처다. 차비가 없다는 사람이 너무 급해 보여서 돈을 꾸어주고 연락처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없는 가짜 전화번호인 경우 사소한 일이지만 안 좋은 기분이 며칠을 가기도 한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물건을 구입했는데 약속과 다른 이상한 물건이 오고 환불은 되지 않을 때 싸다는 것 하나로 들어보지도 못한 쇼핑몰에서 물건을 산 자신에게 화가 난다. 호객꾼에게 걸려서 바가지를 쓰면 짜증나고, 화가 나면서, 바보가 된 듯하다. 아이들이 몰래 지갑에서 돈을 빼가는 것을 알아챈 부모는 우리 아이가 이런 짓을 한다는데 당혹한다.
속지 않고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애초에 불가능하다. 절대로 속지 않는 삶, 배신당하지 않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속고 배신당한 이야기는 다들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속거나 배신당하면 나만 바보같이 당한 것 같다. 사기를 당한 사람이 뉴스에 나오면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했지 하면서 나는 속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보증을 잘못 서서 집까지 차압당했다는 소문을 들으면 `가족 간에도 보증은 서면 안 된다니까` 하면서 자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한다. 남이 바보 같이 속아 넘어간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왠지 내가 더 똑똑해진 듯하다. 하지만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한번쯤은 배신도 당하고 속기도 하게 마련이다. 어떨 때는 자신은 똑똑하다는 자부심 때문에 더 잘 속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속기 마련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가진 행운 본능 때문이다. 자신이 당하기 전에는 설마 그런 일이 내게 닥치기야 하겠냐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암에 걸릴 확률은 점점 올라간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암에 걸리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발생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나이가 들고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정하며 나만큼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을 하면서 오늘을 산다. 운동만 열심히 하면 늙어도 젊을 때와 같이 건강할 것이라고 믿는다.
행운 본능이 있기에 처음 해보는 일에도 도전하고, 위험을 감수한다. 나 한 사람 조심하면 괜찮겠지 하면서 자동차를 처음 몰고 나가고, 우리 아이는 괜찮겠거니 하고 아이를 처음 품 안에서 떠나보낸다. 나만큼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결혼을 한다. 나만은 불행에서 예외이겠거니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위 사람이 불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거나 소문을 들었을 때도, 그 사람이 조심하지 않아서, 혹은 운이 나빠서 그런 불행을 당했다고 생각한다. 막상 내가 당하기 전까지는 조심하게 되지 않는다.
아울러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은 그 고통의 정도가 천지 차이다. 누군가 배신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에 놓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안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막상 그 일을 당하게 되면 마음의 고통은 훨씬 더 강렬하다. 배신의 상처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흔히들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어떻게 하겠어.” “툭 털어버리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지.” “액땜했다고 생각해.” 같은 말을 한다. 누가 바가지를 쓰거나 사기를 당해서 분통해 하는 경우는 그 액수가 크지 않으면 ‘뭐 저 정도 갖고 저 난리를 치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누군가에게 속아서 같은 물건을 천원이라도 더 주고 사면 그 때는 액수와 상관없이 속았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
양다리를 걸친 애인 때문에 괴로워하는 친구에게는 "미친개한테 물린 셈 치라"면서 "질질 끌지 말고 단호하게 헤어지라"고 한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같은 일을 당했을 때는 몇날 몇일 잠을 못자고 뒤척인다. 인간은 막상 본인이 당하기 전까지는 설마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나겠냐고 생각하고, 막상 당해보기 전까지는 그게 뭐 그리 대수이겠냐고 생각한다. 따라서 살면서 수도 없이 속고 배신당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 당연하다. 다들 숨겨서 그렇지 속지 않고 사는 사람, 배신당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인간에게는 망각 본능이 있다. 한 번 크게 배신을 당하면 다시는 속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상처가 잊힐만하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과거에 배신을 당하고 나서도 속을 수 있다는 것을 잊어먹고 또 사람을 믿은 자신이 바보 같다. 하지만 망각 본능은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망각 본능 때문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교통사고를 당하고 또 다시 운전을 할 수 있는 것도 망각 본능 때문이다.
망각 본능이 없으면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울증에 걸리고, 큰 사고를 당할 때마다 모두 외상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릴 것이다. 망각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반면, 망각 때문에 인간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다만 얼마나 자주 그러느냐, 얼마나 큰 손해를 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실상 우리 모두 크건 작건 매일 속고 배신당하면서 살아간다. 텔레비전 CF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멋있어 보이던 물건인데 막상 내가 구입해서 집에 갖다 놓으면 별로다. 홈쇼핑에서 모델들이 입었을 때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보이던 속옷도 막상 내가 입으면 포스가 안 난다. 대단한 화제작이라는 소문에 영화를 봤는데 영 아닌 경우도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다 속은 것이다.
광고라는 행위, 마케팅이라는 행위가 어떤 점에서는 고객을 현혹시키고 속이는 행위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대에 못 미치는 물건을 사고, 기대에 못 미치는 식당에 가고, 기대에 못 미치는 정치인을 뽑는다. 기대치와 경험치의 차이가 너무 크면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기분도 영 나쁘다. 하지만 금세 잊어먹는다. 직장에서건 친구 사이이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이유로 사소한 일은 숨기기도 하고 거짓말도 한다. 상대방의 그런 행위를 알게 되었을 때 약간의 배신감도 느끼지만 그냥 넘어간다. 다만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다 한번 누군가에게 호되게 배신을 당하면 ‘내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으리.’ 하면서 거리를 두고 조심을 한다. 새로 사람을 사귈 때도 조심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흐르다 보면 마음이 바뀐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믿어야지 일도 되고 사는 재미도 있다. 사람들에게 마음을 점점 더 열어간다. 그러다 언젠가는 또 사람 때문에 배신당해 상처 받는다. 그게 반복이 되는 것이 인생이다.
마치 물결이 밀려왔다 밀려가듯이 인간에 대한 신뢰가 다시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작정을 하고 인간의 호의를 이용해먹는 인간들이 있다. 당신이 바보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이용하는 그런 작자들이 나쁜 것이다. 그런 작자들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하지만 구데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 수는 없다. 한번 배신당했다고 해서 앞으로 절대로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서 평생 사람을 믿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절대로 잊어먹지 않는 이는 어쩌면 같은 실수를 절대로 되풀이하지 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로 잊어먹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것이다. 절대로 속지 않기 위해서는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으면 된다. 즉흥적인 것도 없고 항상 원칙에 입각해서 살기만 하면 된다. 그런 삶은 어떠할까? 삭막하고 사는 것 같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자면 배신당하고 속은 것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한다. 누군가 배신을 당한 경우 옆에서 보기에는 누가 누구한테 속았다는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 듣게 된다.
하지만 나의 타고난 성격, 자라난 과정, 지금 처한 상황이 상대방의 타고난 성격, 자라난 과정, 지금 처한 상황과 맞아 떨어질 때 대개 배신이 가능하다. 배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남을 속이는 것이 직업인 경우나 거짓말이 몸에 밴 사람인 경우 그것을 알아챈다는 것은 쉽지 않다. 나중에 생각하면 그 때는 왜 몰랐을까, 도대체 왜 그 때 돈을 맡긴 것인가, 도대체 왜 그 때 눈에 뻔히 보이는 속임수를 눈치 채지 못했을까, 내가 한심해진다. 하지만 그 때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절대로 속지 않는 삶은 어떨 삶일까? 그런 삶에는 변화 역시 없을 것이다. 인간은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다. 변화가 없으면 지루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 배신당하고 속아서 괴로울 때 혼자만 끙끙 앓고 숨기면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서 얘기해라. 그래야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은 당신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당신보다 더 나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대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서 하지만 실상은 아마도 자기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처럼 당신에게 들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남의 더한 불행을 듣다 보면 그에 비하면 나는 약과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어쩌면 그만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너무 집착하지 말라. 마음만 먹으면 언젠가는 망각이 되게 마련이다. 이미 지나간 일이 당신의 발목을 잡도록 하면 안 된다. 굳이 필요하다면 잊는데 도움이 될 만큼만 딱 상대방을 괴롭혀라.
*필자 소개: 부여다사랑병원 원장,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보건학과에서 병원경영 강의, 저서는 <심리학 테라피>, <병원이 경영을 만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