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기(정신과 전문의) http://blog.naver.com/artppper
2004년 독일 올해의 저널리스트에 선정된 바 있는 프랑크 쉬르마허의 저서 <가족 부활이냐 몰락이냐/장혜경 옮김/나무생각>은 고령화사회에서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잘 기술한 책이다. 저자는 수천년을 이어오면서 인류가 혁신과 재생산을 거듭해 온 원초적 힘으로 가족을 뽑고 있다. 나 역시 가족은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모든 측면에서 인류의 가장 아름다우면서 훌륭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우리들은 가족을 위해서 힘든 순간도 참고 직장에서 일을 한다. 젊은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릴 때는 의욕적으로 임하지만, 일이 안 풀리게 되면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직장을 자주 바꾸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을 떠안게 되면 그럴 수 없다. 속상한 일이 있어 직장을 때려 치고 싶다가도 가족들 얼굴을 떠올리면 꾹 참게 된다. 가족을 생각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참아나갈 수 있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인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한다면 그것은 국민총생산의 상당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돕는 것도 가족에서 비롯된다. 의료보험, 국민연금 같은 공적부조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가족, 친척, 친구가 서로 돕는 사적부조다. 흔히 사적부조하면 남을 위한 기부를 떠올린다. 내 부모형제와 친구를 돕는 것은 당연히 여긴다. 그러나 남을 돕는 것도 가족들끼리 서로 돕는 것을 보고 익히면서 시작된다. 지난 일 년 동안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족, 친척, 친구를 위해서 쓴 돈을 모두 모은다면 정부 예산을 훌쩍 넘는다.
우리가 버는 돈 중 우리 자신을 위해서 쓰는 부분은 의외로 많지 않다. 결혼을 한 경우 가족을 위해서 수입의 대부분을 쓴다. 정부의 공적부조는 민간의 사적부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최소한도의 도움을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가족이 붕괴된다면 현재 민간이 가족, 친지를 위해서 쓰는 사적부조가 없어질 것이다. 그 만큼이 고스란히 국가의 부담이 될 것이다. 가족과 친지를 자발적으로 돕는 것도 줄어드는 마당에 하물며 친구, 동료, 이웃을 자발적으로 돕는 것은 더욱 드물게 될 것이다.
나이가 들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노화하게 되면 만나는 사람들의 폭도 좁아지게 된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죽는 이들도 늘어난다. 내 몸이 아파서 나들이를 하기도 힘들고 친구들도 몸이 아파서 나들이를 하기가 힘들다. 그 때 가족은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감정의 버팀목이 된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인간의 능력은 언젠가는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퇴하게 마련이다.
그 때 공적인 영역에서의 쇠퇴를 보상해줄 사적인 공간이 바로 가정이다. 가족이 없다면 그는 외로움 속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 가족은 마음의 측면에서 우리를 마지막까지 위로해주는 존재다. 삶을 마감할 때 내 옆을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처럼 무섭고 두려운 것이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고립될수록 자살을 하는 어르신들이 늘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정부에서 적절한 부양비용을 감당한다면 아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부모와 사회에 유리해 보인다. 하지만 무조건 자식이 많으면 좋다고 하는 태도도 문제가 있다. 가정이 화목하고 서로 올바로 자기 몫을 할 때는 가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가족들끼리 반목하고 서로 의존하고 이용할 생각만 한다면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만 커질 것이다.
따라서 부모가 부부로서 먼저 행복해야 한다. 그 행복이 자식에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자식이 행복하게 살면서 부모를 위해주면 부모는 보람의 형태로 자식으로부터 더욱 커진 행복을 되돌려 받게 된다. 이렇게 행복의 연쇄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반면 부모 자신들이 부부로서 사이가 안 좋으면, 자식들도 행복할 리가 없다. 부모 자신들이 문제가 있어서 아이가 외로워 보이는데, 어떤 부모들은 자신들의 문제는 보지 못하고 아이가 형제가 없어서 외로워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엄마는 아이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달래주지 못한다. 그래서 아이가 공허한 마음이 있다. 사실 아이의 마음이 공허한 이유는 어머니의 태도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가 외로워 보인다면서 동생을 낳는다. 아이는 그나마 받고 있던 어머니의 관심도 동생과 나눠야 한다. 어머니는 아이가 둘이 되었을 때 아이가 하나였을 때보다 더 정신이 없다.
이런 가정에서는 형제도 서로를 위하게 되지 않는다. 형제는 그나마 부족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조금이라고 많이 받기 위해서 다투게 된다. 따라서 아이가 한 명이 되건, 두 명이 되건, 세 명이 되건 부모가 아이들에게 필요충분한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는 행복한 가정에서는 자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즐거움이 커진다. 반면 불행한 가정에서는 아이가 많으면 많을수록 괴로움이 커진다.
남아선호사상 때문에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 본인은 원치 않지만 시댁의 강요로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자녀를 출산하던 관행이 있었다. 아들이라고 기대했는데 딸이 출산되어 부모가 실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가정도 적지 않았다. 딸은 딸대로 구박을 받아서 마음이 상하고, 아들은 아들대로 떠받들어지기만 해서 버릇없게 크는 것이다. 이런 경우 역시 자식이 많아도 불행하다. 누나는 버릇없는 동생을 도와줄 리 없고, 동생은 쌀쌀맞은 누나를 도와줄 리 없다.
더 심한 경우로 미국에서는 한 때 저소득층 여성들이 양육비를 나라에서 받아내기 위해서 자녀를 계속 출산하는 것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빈민가에서 크면서 마약과 범죄의 덫에 빠지게 되고, 또 그들의 아이들이 마약과 범죄를 확대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가정과 사회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으면 낳을수록 모두에게 불행이 커질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 어머니, 자녀 모두가 새로운 식구를 원하고 반기는 화목한 가정에서는 자식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세상은 돌고 돈다. 누구나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그 시절에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했다. 아이도 하나의 사람이고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다들 몇 명씩 자식을 낳던 시절에는 한두명만 자식을 낳고 최대한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다. 하지만 남들이 다 그러니까 자기 먹을 숟가락은 쥐고 태어난다면서 다산(多産)이 당연시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 한명 당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많다고들 한다. 특히 사교육비 때문에 다들 고민이다. 그래서 아이를 한명만 낳고 그 한명을 위해서 부모가 모든 여력을 다해서 최선을 다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렇게 최고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다고 해서 과연 그 아이들이 꼭 성공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위를 보면 기대를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성공을 하고, 기대를 받던 사람들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대다수다. 한 인간의 성장과정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작용하기 때문에 부모가 나름 치밀한 작전과 전략으로 양육을 한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한 명에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두 명에게 그것을 나누는 것이, 두 명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보다는 세 명에게 나누는 것이 차라리 더 현명하다. 지금은 다소 걱정도 되고 부담도 되더라도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다.
가정이 화목하고 여유가 있다면 아이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리고 부모의 충분한 애정이 있어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형제자매들은 서로에게 있어서 세상에 둘도 없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먼저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 그리고 행복이 넘치면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이이를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가지도록 하자.
*필자 소개: 부여다사랑병원 원장,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 보건학과에서 병원경영 강의, 저서는 <심리학 테라피>, <병원이 경영을 만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