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칼럼]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남자는 가을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근거는 조선시대 명의 허준과 14대 임금 선조의 대화 속에 들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선조는 세수(나이) 쉰하나에 중전 의인왕후 박씨를 잃은 뒤 19세의 꽃다운 여인을 새 중전으로 맞이하고도 한동안 박씨를 잊지 못해 당시 어의였던 허준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올해 가을은 먼저 간 중전이 그립고, 그 빈 자리도 너무 커 보이네. 기분도 가라앉고 우울해지고 때로는 갑갑해서 이 궁궐을 벗어나 어디론가 다녀오고픈 생각이 드니 이것이 어떤 연유인가?” 그러자 허준은 선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자연의 이치로 볼 때 봄에 새싹이 솟아나는 것은 겨우내 땅속에 들어가 움츠리고 있던 기운이 솟아 하늘로 올라가는 시기이기 때문이며(양기가 솟는 시기), 가을은 여름 내내 한껏 올랐던 기운이 다시 하늘에서 땅으로 돌아가는 시기(양기를 갈무리하는 시기)입니다. 인체의 변화도 이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합니다. 봄은 기운의 흐름이 음인 여자에게서 양인 남자에게로 변하여 흐르는 시기이고, 가을은 양인 남자에게서 음인 여자에게로 흐르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 하옵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하는 것이옵니다.” 한의학적으로 볼 때 봄과 여름에 발휘되는 따뜻한 양기는 실제 가을과 겨울에 저장됐던 음기를 밑거름으로 삼아 올라오는 기운이다. 반면 가을철의 서늘한 기운은 봄과 여름에 솟은 양기를 수렴, 저장해 두는 현상이다. 가을 하늘이 더욱 맑고 푸르게 보이는 것도 하늘에 만연했던 탁기(濁氣)가 가라앉게 돼 나타나는 현상으로 풀이된다. 가을이 되면 많은 사람, 특히 남자들이 정신적으로 우울한 기분에 사로잡히기 쉬운 이유 역시 천지의 기운이 하강하는 계절적 요인의 작용으로 해석된다. 의인왕후 박씨를 잃고 공허한 선조에게 허준이 내린 처방은 ‘산양(山養)산삼’을 주성분으로 한 보약이었다. 산양산삼은 천연 산삼의 씨앗을 받아 산에서 6∼10년 동안 자연 재배한 것을 가리킨다. 인삼을 산에서 재배한 장뇌삼보다 약효가 더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양산삼은 특히 기운이 가라앉아 공허하고 우울한 마음이 들 때 기력을 돋워주는 약재다. 조선의 왕 가운데 83세로 제일 장수했던 영조도 평소에 이 산삼을 자주 복용했다고 전해진다. 산양산삼은 그대로 씹어 먹거나 달여 먹어도 좋지만 약침(藥針)으로 맞을 때 더 효과적이다. 폐의 기운을 조화롭게 해주는 혈위(穴位·침을 놓는 자리)에여름철 무더위로 인해 약해진 기력을 쉽게 회복할 수 있다. 안병수 안중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