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과 관련해서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어떤 질환에 어떤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했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일단 쓰고 보겠다’는 식의 대응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봅니다”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둘러싼 갈등을 지켜보던 한의계 관계자의 말이다. 몇 년째 계속되고 있는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과 관련된 갈등이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한한의사협회(이하 한의협) 측은 꾸준히 한의사가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가 계속해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한의협의 주장이 설득력을 잃고 있는 모양새다. 한의협은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 문제는 국민건강증진을 위해서도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되는 사항”이라며 “보건복지부는 법적논쟁으로 가기 전에 갈등을 조장하는 무책임한 태도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국민과의 약속인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하지만 "정작 한의계가 어떤 이유로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과학적 근거와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마련하고 있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한의협의 태도는 일부 한의계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지난 2015년 혈맥약침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치료비 환급 처분을 받은 한의사 A씨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혈맥약침술은 한방원리에 해당하지 않는 행위이므로 한의사 면허 내 의료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면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A씨는 즉각 항소했고 2심 재판부는 “혈맥약침술의 시술원리 등이 약침술과 차이가 없고 한국표준한의의료행위분류 개정안에 따라 약침술의 범위에 포함된다”며 “보건복지부 고시 ‘건강보험 행위 급여·비급여 목록표 및 급여 상대가치점수’에 등재된 비급여 항목으로 등재된 약침술의 범위에 해당한다”며 1심 재판부의 판결을 뒤집었다.이처럼 한의사가 1심을 뒤집고 2심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근거 마련’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번 소송과 관련된 학회는 2006년부터 한의사의 의료행위에 대해 410여 행위 개발과 논문 등 근거마련을 철저히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지난 2013년에는 한의사가 의료기기를 사용해 안질환 등의 진료를 한 행위가 재판관 전원 일치로 합헌이라는 결정이 나오기도 했다. 헌법재판소는 2인의 한의사가 의료기기 사용에 대해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청구인들의 평등권 및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으로 기소유예처분을 취소한다’고 결정했다.2인의 한의사는 지난해 한의원에서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세극등현미경, 자동시야측정장비, 청력검사기 등의 의료기기를 이용해 환자를 진료했다는 이유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부터 기소유예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해 헌법소원을 제기한바 있다.헌법재판소는 “의료법 제27조 제1항 본문 후단의 해석 또한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데 중점을 두어 해석돼야 한다”며 “따라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의료기기의 성능이 대폭 향상되어 보건위생상 위해의 우려 없이 진단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자격이 있는 의료인인 한의사에게 그 사용권한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해석돼야 할 것”이라고 판시했다.사실 한의계에서 일어나는 법적인 문제들은 대부분 ‘근거부족’ 문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몇 년째 논란이 되고 있는 천연물신약 문제도, 의료기기 사용 문제도 그래왔다. 한의계는 근거가 있다고 제시를 하지만 반대 입장의 세력을 무력화할 정도로 표준화되거나 명확하지가 않다 보니 이슈를 만들고도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때 한의협은 혈맥약침 소송과 헌법재판소 판결의 사례를 교훈으로 삼아야한다. 근거를 가지고 싸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이미 일부 한의계가 증명했기 때문에, 한의협도 근거 중심적으로 현대 의료기기 사용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국민을 위한다’는 추상적인 이유만 들며 어린 아이 떼쓰듯 펼치는 한의협의 근거 없는 주장으로는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 판결 당시 한의협은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활용에 법적근거가 마련됐다며 무척이나 반겼다. 그 후 3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한의협은 이와 관련한 그 어떤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무작정 ‘일단 쓰고 보겠다’고 우기기만 한 결과는 그만큼 참담했던 것이다. 한의협은 지금이라도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근거 마련에 힘써야 한다. 또한 법조문에 미비 되어 있는 관련조항의 즉각적인 제·개정과 행정적인 조치 등이 이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