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자들에게는 와인이 여러모로 어렵게 생각된다. 와인이 어렵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특히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어려운 와인 법 때문이고 또 이를 따라서 만든 유럽 여러 나라의 와인 법에 기인한 바가 크다.
프랑스, 이태리,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나라들은 같은 라틴계라 문화가 비슷하고 또 와인의 법도 비슷하다. 독일에도 와인 법이 있는데 게르만족이라 라틴계의 와인 법과는 사뭇 다르다. 독일 와인 법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프랑스 와인 법 못지않게 어렵게 느껴지는데, 처음에 좀 이상한 연유로 생겨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독일로 가는 한국의 여행객들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여 대부분 방문하는 관광지가 괴테 하우스가 있는 프랑크푸르트,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그 다음은 로렐라이 일 것이다. 그 로렐라이로 가는 도중 오른쪽에 요하네스베르크 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가게 되는데 이야기는 바로 요하네스베르크 동네에서 시작된다.
요하네스베르크에는 “쉬로스 요하네스베르크” 라는 성이 있고 이 성은 3 개의 건물로 되어 있다. 하나는 포도주 공장, 하나는 후작이 사는 개인 저택(이 저택의 지하에 포도주 저장실이 있다) 또 하나는 수도원이다. 중세에는 일반인들이 포도주를 만들지 못하였고 또 포도원들은 대부분 수도원들의 소유이었다. 이 동네 인근의 많은 포도원들이 모두 이 수도원 소속이었다. 이런 연유로 이 수도원의 수사는 인근에 있는 수도원 소속의 많은 포도원의 관리와 포도주 양조를 책임지고 있었다.
봄철부터 열심히 포도를 재배하고 포도원을 관리하여 가을철에 포도가 익으면 수확하였는데 자기 혼자 알아서 수확 시기를 결정하지 못하고 상당히 떨어진 곳인 풀다에 있는 상급 수도원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 상급 수도원은 요하네스베르크 이외에도 몇 곳의 수도원을 관할하고 있었다.
하여간 요하네스베르크 수도원의 수사는 가을철에 포도가 익었다고 생각하면 표본이 되는 포도송이를 몇 개 따서 전령 편으로 풀다로 보냈고 거기서 포도의 맛을 보는 전문 수사가 맛을 보고 “아직 덜 익었다.”고 하면 전령이 이 말을 요하네스베르크의 수사에게 전달하였으며 이 수사는 며칠을 더 기다렸다가 다시 포도 송이 샘플을 풀다로 보내었으며 풀다의 맛보는 고수 수사가 `OK` 하면 그때서야 포도 수확을 시작하였다.
그해에도 예년과 같이 포도가 잘 익은 것 같아 요하네스베르크의 수사는 포도송이 샘플을 준비하여 전령에게 풀다에 다녀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면 돌아와야 할 전령이 오지 않았다. 며칠을 더 기다려봤는데도 녀석은 돌아오지 않고 포도원의 포도는 점점 더 익어갔다. 그냥 두었다가는 과숙으로 인한 병, 충해 등으로 인한 피해가 우려가 되는 상황이라 드디어 수사는 결단을 내렸다. “내가 책일 질 테니 오늘부터 포도 수확을 합시다." 그래서 수도원 소속 포도원의 포도를 다 수확하여 포도주를 만들었다.
독일도 인근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봄철이 되면 전년도 포도로 만든 와인을 병에 담아서 지하실에 저장해 두고, 포도주 공장 인부들이 그때부터는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곤 하였다. 매년 와인을 병에 담을 때쯤이면 상급 수도원의 신부들, 수녀들, 수사들이 작년도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의 맛이 어떨까 하고 상당히 궁금해 하면서 관할하고 있는 수도원들에서 그 전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의 샘플을 보내라고 지시하였고 가지고 온 샘플들을 시음하였다.
대부분 연세가 지긋한 신부, 수녀, 수사 등 고승들이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각 수도원에서 보내온 샘플들의 맛을 보았다.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포도의 품종은 리스링(Riesling)이라는 거의 한 가지 품종이고 또 포도의 맛을 본 사람도 한 사람이어서 익은 정도가 다 비슷하였으므로 각 수도원의 와인 맛은 해마다 비슷하였다. 그런데 그 해에는 그 중에서 유독 향과 맛이 독특한 와인이 있었던 것이다.
시음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와인은 맛이 엄청 훌륭하다. 어느 수도원에서 온 와인이냐"고 해, 알아보니 요하네스베르크에서 온 와인이었다. 요하네스베르크에서 와인 샘플을 가지고 온 사람을 불러서 "도대체 이 와인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고 물어 보니 그 사람이 "늦게 수확했습니다(Spa"tlese)" 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하여서 이 `스페트레제`가 생겼다.
이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여 "아, 포도를 늦게 수확하면 더 좋은 와인이 되는 구나" 라고 생각하여 점점 더 늦게 수확한 포도로(다시 말하면, 점점 더 잘 익은 포도로) 와인을 만들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독일에서 더 고급 와인의 등급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 등급은 다음과 같다.
독일 고급 와인 중에서 스탠다드는 카비네트(Kabinett), 그 위 등급이 위에서 말한 늦게 수확한 스페트레제(Spa"tlese), 그 위 등급은 늦게 수확하면서 잘 익은 송이만을 골랐다는 아우스레제(Auslese),
그 위 등급은 늦게 수확하면서 잘 익은 송이를 골라서 그 중에서도 잘 익은 포도 알 몇 개를 골랐다는 베에렌아우스레제(Beerenauslese), 그 위 등급은 늦게 수확하면서 잘 익은 송이를 골라서 그 중에서도 잘 익은 알갱이 중에서 건조한 포도 알 몇 개를 골랐다는 트로켄베에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이다. 이 와인은 병 걸린 포도로 만든 와인이다. 병은 병인데 꼭 귀부병이란 병에 걸린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이 독일 최고급 와인이고 세계에서 최고급 와인이다. 대부분 화이트 와인이다. 이 귀부와인과 같은 등급이며 언 포도로 만든 와인인 아이스바인(Eiswein)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이 `쉴로스 요하네스베르크`성의 마당에 가면 소문으로는 심부름 갔다가 바람나서 제때에 돌아오지 못하였던 엉뚱한 그 심부름꾼이 아직도 포도송이 몇 개를 들고서 말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조각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스페트레제가 여기에서 탄생하다" 혹시 프랑크푸르트 쪽으로 여행을 가시게 된다면 얼빠진 전령을 한번 만나보시기 바란다.
*필자 소개: 연세대 화공과 졸업, 미국 포도주 공장 연수(캘리포니아, 뉴욕 주), 독일 가이젠하임 포도주 대학에서 양조학 수학, 프랑스 보르도 소재 CAFA 와인스쿨 정규 소믈리에 과정 수료, 국산 와인 마주앙 개발 주역으로 중앙대, 세종대 초빙교수 역임,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단국대, 기업체 등에서 와인 특강, 저서로 `와인, 알고 마시면 두배로 즐겁다(세종서적)` `와인 인사이클로피디아(세종서적)`, `와인 가이드(중앙북스)`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