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란 한 폭의 그림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이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    수필가 허숭실 씨(71, 사진)는 지난 1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사전의료의향서(事前醫療意向書)` 작성운동 세미나에 참여한 후 자신의 인생관을 이렇게 피력했다. 그녀에게 생의 완성은 죽음마저 아우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임종을 다룬 수필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마지막 여행’이 아름다운 죽음의 사례로 선정돼 세미나에 초대받은 허씨는 그자리에서 `사전의료의향서`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전의료의향서`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 대해 의료진이 회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경우,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사표시를 담은 진술서다. 그녀는 죽음 앞에 주체적이고 당당했던 아버지와 같이 자신 또한 죽음 앞에 존엄성을 지키고자 ‘사전의료의향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요즈음 남편, 형제, 친구 등 지인들에게 행복한 죽음을 전파하는 전도사로서 ‘사전의료의향서`를 설명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허 씨를 만나봤다. - 사전의료의향서를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령화사회는 이 시대의 화두를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가’로 자연스럽게 이끌었습니다. 기대수명이 늘어나자, 사람들은 병 없이 오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오래 사는 것이 행복할까’, ‘누구든지 늙고 병드는데 이를 어떻게 감당 해야 하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주변사람들이 점차 떠나게 되는데, 이럴 때 느끼는 절대 고독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등 다양한 문제를 고민하게 됐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세미나에 참가하기 전까지 저는 사전의료의향서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조연설과 사례 등을 접하면서,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이 사전의료의향서를 쓰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물인간, 말기암 환자, 뇌사 판정을 받은 환자들은 더이상 생명연장이 본인에게 무의미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족들은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고 있는 모습이라도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겠지만, 그로 인해 파생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더 많기 때문에 사전의료의향서가 필요합니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면,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에 사본이 남습니다. 이는 당사자의 몸에 무리한 의료행위를 하지 못하게 해,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과도한 의료비와 가족의 정신적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의료진들에게는 불필요한 치료와 수술을 요구하지 않게 하며, 환자치료에 관한 가족간의 의견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습니다. 즉, 불필요한 소모전을 줄이고, 환자 자신이 원하는 치료만 받게 해 당사자가 평온하게 숨을 거둘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더불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재산 등 외부적인 요소만을 정리하며 생을 마감하는 현실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장점들 때문에 나는 내 또래 지인들과 함께 사전의료의향서 공동 작성을 위한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의견이 모아지면, 사전의료의향서를 우편으로 전달할 생각입니다.   - 사전의료의향서를 쓰는 것이 두렵지는 않으신가요.   제 나이는 일흔이 넘었습니다. 이 정도의 나이가 되면 삶에 여한이 없습니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것을 일부에서는 무겁게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저는 삶의 한 방식으로서 마땅히 받아들일 수 있는 절차라고 생각합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계획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내 의식이 불분명해져서, 하얀색의 그림으로 남고 싶었던 나의 일생을 검정색 그림으로 남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 존엄성을 지키며 생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모님과 시어머님의 임종모습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친정어머니는 뇌일혈(중풍)로 6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투병 기간 동안 우리 5남매와 아버지는 어머니의 수족이 되어드렸습니다. 어머니께서 자식과 남편에게 한평생 베풀었던 사랑을 부족하나마 우리가 조금씩 되돌려 드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마음은 아팠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돌아눕는데도 자식과 남편의 도움이 필요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 자신은 얼마나 답답하고 슬프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친정어머니에 이어 시어머니도 3년간 노환으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셨고, 음식조절 또한 제대로 하실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온 몸을 제게 맡기신 시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친정어머니가 아프셨을 때처럼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두 어머니의 죽음은 제게 ‘사는 게 무엇이고, 죽는 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힘겹게 떠나보내시고, 주체적인 죽음을 맞이하려 애쓰셨습니다. 1994년 가려움증 때문에 병원에 가셨던 아버지는 결국, 담도암을 선고 받았습니다. 간까지 암이 번져나갔지만, 항암치료를 끝내 거부하셨습니다. 경영하던 회사를 정리 하시고, 동료와 친구, 친척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함께 사업을 하다가 배신한 사람들까지 만나 오히려 위로금을 주셨습니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한달여간 여행을 다녀오셨습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신 것입니다.   그 후,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장남의 세 아들들이 학업을 이어 갈수 있도록 회사 지분을 남겨 주셨습니다. 고별 예배를 갖고, 자신의 장례 절차를 적은 글을 목사님께 남기시며 장례를 부탁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마음의 빚을 조금씩 덜어내고 계셨습니다. 흐트러짐 없이 신념대로 죽음을 준비하셨던 모습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암 선고를 받으신 지 거의 6개월 후 아버지는 행복하게 눈을 감으셨고,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저와 우리 가족 모두의 가슴에 아로 새겨졌습니다.   어떤 이들은 왜 아버지께 항암 치료를 받으라고 강경하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효도는 부모가 원하는 바를 헤아려 이를 실천할 수 있게 하는 것이지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의 ‘사전의료의향서’처럼 작용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뜻은 세대를 이어 지금의 저와 저의 가족에게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다룬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마지막 여행’이 지난 8월 한 일간지에 발표되자, 제 손녀딸은 말했습니다. “할머니, 증외조부님의 뜻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어요. 글로써 그 마음을 세상에 알려주셔서 감사해요”라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아버지처럼 존엄성을 지키며 생을 끝내는 것에 자식들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 부모님께서 모두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남편이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지난 1993년, 우연히 유방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겉으로 아주 건강할 때 갑자기 안 사실이라, 죽음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속옷에서 피가 묻어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가슴을 눌러보니 유두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놀란 마음에 회사 지정 유방암 전문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싱가포르의 의료시설이 훌륭한 덕분에, 유방암 진단 후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까지 하루 만에 모든 것이 이뤄졌습니다. 저를 검사한 의사는 내가 상담을 받을 수 있게 퇴근 시간까지 미뤄가며 살펴주었습니다. 그 의사는 제가 암일 가능성이 51% 정도이고, 치료를 위해서는 수술이 가장 효과적이라며 수술을 권했습니다. 저는 안정제를 먹으면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알레르기 반응이 있었습니다. 의료진은 알레르기 반응등 유의해야 할 사항 등을 꼼꼼히 체크해 가며 수술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한국에 있던 아버지와 아이들에게는 암에 걸린 사실을 알리지 않고, 남편만 알고 있는 가운데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아이들이 모두 장성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무서움 보다는 그냥 수술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수술을 받으러 들어갈 때도 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왔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수술 경과는 좋았습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퇴원을 한 뒤에야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맘이 아려오는 것은 그 후부터 아버지께서 아프시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나는 수술 후 1년마다 정기검진을 받고 있습니다. 5년 이전에 암이 재발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했는데, 수술한지 16년이나 지났습니다. 한번 크게 앓고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병에 대한 공포는 이제 없습니다.   - 지금까지 건강을 지켜낸 비법을 알려주세요.   수필가가 되기 이전의 저는 엄마, 아내, 직장인으로서 바쁜 일상을 보냈습니다. 얽매였던 삶을 보내고 나니, 자유가 절실했습니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한 것도 자유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저는 자유를 속박해가며 건강해지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여유 시간이 있다면, 오전에 강아지와 함께 집 앞 정발산으로 산책을 하러 갑니다. 산에 올라가서는 가벼운 체조를 하거나 체육공원에 마련돼 있는 운동기구로 허리돌리기 등을 합니다. 새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기도 합니다. 오후에는 꽃밭을 가꾸며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매일 운동해야한다는 규칙을 만들지 않습니다.   글을 늦은 시간까지 쓰거나 어려운 책을 읽기 위해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을 때에는 다음날 부족한 수면을 충분히 보충합니다. 체면을 차리기 위해 모임에 억지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식탐도 없어 과식하지도 않습니다. 자유롭게 자고, 자유롭게 운동하고, 자유롭게 시간을 쓰는 것이 저의 건강 비결입니다.   -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삶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들은 더 많은 새로운 것들을 습득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는 것은 경과된 세월에 비례하는 게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더 사랑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살아갑니다. 그 후회가 쌓이면 또 삶이 됩니다. 반복되는 삶의 후회와 고통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힘을 얻어, 새로운 사랑을 발견해 나갑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가다보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일생동안 그려온 그림을 완성시키는 것이 바로 죽음이기에 그 모습도 삶의 모습과 닮아야 합니다. 한 폭의 그림 안에 삶과 죽음이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음을 아름답게 끝맺음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허숭실 수필가는 1940년 중국 내몽골 우란호트에서 태어나 8.15 해방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회원이며 이대 문인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수필집 `꽃은 흔들리며 사랑한다`(2009)를 발표했다.      
최종편집: 2025-05-01 22: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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