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나눔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한 인상에 선한 웃음. 그리고 말쑥한 옷차림. `구텐 백` 아저씨다. `구텐`은 독일어로 Guten, ‘착한, 선한’이란 뜻이다. 푸르메재단의 백경학(47, 사진) 상임이사.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효자동 구텐백`이란 책을 쓴 그는 이 이름으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도 ‘어느 날 갑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 일어났다. 1998년 6월이었다. 당시 기자였던 백경학 이사는 독일에서 연수를 받다가 귀국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영국으로 가족 여행을 가게 됐다. 스코틀랜드에서 런던으로 향하던 산길에서, 딸(6)의 속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차를 세웠다. 아내 황혜경씨가 옷을 꺼내려고 트렁크 쪽으로 향한 순간 갑자기 차량 한대가 뒤에서 돌진, 황씨를 덮쳤다. 나중에 그 운전자는 편두통으로 두통약을 복용한 상태에서 갑자기 정신을 잃고 사고를 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 씨는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후에 의식은 회복했으나, 결국 소중한 다리 한쪽을 절단해야 했다.
영국과 독일에서 치료를 받다가, 귀국한 백 이사 부부는 한국의 열악한 재활치료 현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재활치료를 위해 환자들은 대략 2~3개월을 기다려야 했고, 병원에 입원하더라도 북적이는 방문객들에 몸이 이리저리 치일 수밖에 없었다. 병실이 부족했던 것은, 재활병원의 경영은 이문을 남기지 못했고, 따라서 많은 병원들이 재활병원 설립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부는 다짐했다. 병원을 찾아 전전하지 말고, 같은 아픔을 가진 이들이 독일 등에서 처럼 따뜻하고 안정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재활병원을 설립하겠다고.
백 이사가 재활병원 설립 의지를 가진지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이제 푸르메재단에는 치과도 있고, 한방치료센터도 있다. 푸르메 어린이재활센터가 3번째 생일을 맞아 작은 음악회를 연 23일 백경학 이사를 만나봤다.
- 푸르메재단이 생긴지 5년이 지났습니다. 감회가 어떠신지요.
행복합니다. 이곳은 다른 어떤 곳보다 목표가 뚜렷한 장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힘이 돼 주는 것. 또 그들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치료비 부담 없이 재활시설, 의료센터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게 저희들이 하는 일입니다. 재활 치료를 도와 장애환자들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보람됩니다. 또 이 일의 장점은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99%이상은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 마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감사하고 대단하다고 감탄합니다. 제게 배움과 삶의 희망을 알려주시기 때문이죠.
- 푸르메재단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현재 어린이재활센터에서 허영진 원장님(대한약침학회 의무이사)께서 열정적으로 21명의 꼬마들에게 한방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7세 이하의 자폐, 뇌성마비, 다운증후군 등을 갖고 있는 꼬마들이지요. 그 중에서도 한방치료가 몸에 맞는 꼬마들을 선정해 치료해줍니다. 허영진 원장님께서 오전에는 자신의 한의원 문을 닫고 오셔서 헌신적으로 활동해 주셔서 가능한 일입니다. 먼저 치료에 앞서 꼬마들의 몸 상태 체크와 면담이 이뤄집니다. 이에 따라 치료여부가 결정되구요. 재단에서 어린이재활센터에 매달 550만원 정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꼬마 10명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셈이지요. 재활 치료 기간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떤 꼬마는 6개월만에 재활이 끝나는 반면, 어떤 꼬마는 몇 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 이사님의 하루 일과를 알려 주세요.
특별하진 않습니다. 아침 7시 30분 전후해 재단에 나와 그날 할 일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 후에 외부에서 온 메일들을 체크해 답변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메일은 재단에 관한 그 분들의 관심의 표현이니까요. 매일 아침 8시 30분에는 회의를 합니다. 회의가 끝나면, 기업인이나 개인 후원자를 만나 내년 사업을 제안하거나, 추진 중인 사업 관련 내용을 협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기금 모금을 부탁드리기도 하구요. 저녁에 있는 약속이나 모임에 참가해 재단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 푸르메재단의 사업과 기금 유치에 관한 일이 대부분이네요. 성과는 어떻습니까.
올해 서울시 종로구와 협약을 맺어, 내년에는 병원과 복지관의 개념을 혼합한, 낮에 외래병원으로 사용될 수 있는 어린이재활센터가 효자동 네거리, 구청이 푸르메재단에 빌려준 땅에 만들어집니다. 절반은 복지관, 절반은 어린이재활병원으로 꾸며질 예정이구요. 현재는 지하에 공영주차장 공사를 하고 있고 재활센터는 내년 6월쯤 착공해 그 이듬해인 2012년 11월 완공할 예정입니다.
지하 1~4층은 종로구청이 공영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지상의 3천756㎡ 규모 어린이재활센터와 복지관은 저희가 맡아서 운영하게 됩니다. 공사비는 총 80억원 정도 드는데, 현재까지 모은 기부액 중 30억원이 사용될 예정입니다. 나머지 50억원은 건설회사, 내외장재 회사, 엘리베이터 회사 등에 시설 기부를 요청하거나 시민과 기업을 상대로 기부액을 호소할 생각입니다. 지금은 기부액 유치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홀로 사시는 오길순 할머니께서 2억원을 기부해주셨고 지난주에도 증권전문가 여인수씨가 2천만원을 기부하시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운 어린이들을 치료하는 재활센터에 관한 관심이 늘고 있습니다.
2012년 정도면 새로운 어린이재활센터에서 약 80명의 꼬마들을 진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때가 되면 대기상태에 있던 29명의 꼬마들도 재활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꿈에 그리던 재활병원 설립에 한층 더 다가가게 되는군요.
말씀하신대로 저희의 최종 목표는 재활병원 설립입니다. 1병상 당 3억원정도로 계산하면, 150병상을 갖춘 재활병원이라면 약 450억원이 듭니다. 큰 돈이지요.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이전부터 경기도 화성시와 재활병원 설립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하지만 최근 화성시의 재정상태가 너무 열악해지면서 병원부지를 사서 저희 재단을 빌려줄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화성시에서는 부지확보가 어려우니 재활병원 설립을 3년 정도 유예하자고 제안해왔습니다.
- 추진 중인 다른 계획은 어떤게 있습니까.
서울시 마포구와 함께 장애인 작업장을 만드는 사업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생산라인을 가져와 마포구에 장애인작업장을 만들게 되면 장애인들은 부가가치가 높은 물건들을 만들게 되고, 그 임금으로 생계도 꾸려나갈 수 있게 됩니다. 마포구는 고양, 김포, 파주 등 경기도와도 근접해 있어 장애인작업장이 있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포구는 현재 3천305㎡ 정도의 땅을 사서 기부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구요.
- 우리나라 재활치료 현실은 나아졌습니까.
제가 독일에서 귀국했을 당시에는 재활시설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국립재활원과 신촌세브란스 재활병원, 지방의 규모가 작은 재활병원 정도였지요. 지금은 재활병원이 20여개 정도 됩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고, 어느정도 제도 개선도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큰 변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치료대기 환자는 줄을 잇고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은 이 마저도 할 수 없습니다. 많은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몸과 뼈가 굳어져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고 있습니다. 재활치료를 받으면 약 70~80% 정도 회복이 가능합니다. 반면, 치료를 받지 못해 몸이 굳어 버린 사람은 평생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이는 개인적 불행이기도 하지만, 사회-국가적 손해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이 재활에 성공해서 가정과 사회에 복귀했을 때 드는 사회적 비용은 누군가에게 간병을 받아 생활하는 사회적 비용의 1/4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장애`와 `가난`이라는 이중적 고통을 아직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일반적으로 재활 치료에는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듭니까.
입원비는 한달에 350만원 정도입니다. 간병인을 쓰게 되면 하루 7만~8만원 정도의 일당을 줘야 하기 때문에 한달에 약 200만원이 더 필요합니다. 합치면 550만원 정도가 됩니다. 정부에서 지원을 한다해도 한달에 350만원 정도의 비용을 웬만한 직장인이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닙니다.
- 돈 걱정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방안이 없을까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적절히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 그리고 저희와 같은 사회단체가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국민들의 저항이 있을 수 있지만, 건강보험료도 현실화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서민들은 조금 더 내고, 부자들은 더 많이 내도록 해야 합니다. 대신 누구라도 다쳐 재활치료와 수술이 필요하면, 그 혜택을 받아야 하구요. 부자들은 외국에 나가 재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기 때문에 일반 시민이 제대로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의료비를 현실화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긴 하지만, 분명히 사회적인 합의점을 찾아야 합니다.
-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입니까.
열 번 힘들고 괴롭고 불행하다가 한번 행복하면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꼬마들이 직원들의 어설픈 공연과 마술을 보면서, 소리를 지르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소소한 행복감에 젖어듭니다.
재활병원 설립이 꿈이기 때문에 종로구와 어린이재활센터 협약을 맺었을 때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또 조금전 말씀드린 대로 오길순 할머니께서 우연한 기회에 푸르메재단을 알게 됐다고 손을 잡아주시면서 아이들을 위해 재활센터를 건립해달라고 2억원을 기부해 주셨을 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 고통스러울 때도 있겠지요.
주무관청이나 지자체와의 관계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불필요한 일을 하게될 경우가 있습니다. 주무기관에서 얼마든지 서로 상의하고 정책적으로 배려해줄 수 있는 사항임에도 갑자기 자료를 요청하거나 권위적으로 지시할때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 합니다.
- 어려울 때마다 생각하는 일생의 멘토는 누구입니까.
제겐 멘토가 여러 분 계십니다. 우선, 재단 이사장이신 김성수 성공회 주교님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김 이사장님은 평생 장애인들과 함께 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성공회대에 계실 때 정신장애를 가진 청소년들을 위해 성베드로 학교를 성공회대 안에 만드셨는데 이들 학생이 졸업한 뒤 오갈 곳이 없자 유산으로 받으신 사재를 털어 인천 강화도 온수리에서 <우리마을>이라는 직업생활공동체를 만들어 장애인들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제게는 멘토이시면서 성자이십니다. 재단 대표이신 강지원 변호사님도 평생을 청소년과 장애인을 위해 변호사 사업마저 접으신 채,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님도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 계시구요. 모두 자신의 몸을 던져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힘써 주시는 분들입니다. 재활센터 꼬마들의 부모님들도 제겐 멘토이십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다른 누구! 보다 더 크시니까요.
- 연말입니다. 한 해중 가장 기부가 활발할 때인데,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비리 이후, 영향은 없습니까.
큰 영향은 없는 듯합니다. 푸르메재단이 하는 일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나 저소득층의 어린이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후원자분들은 이를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할 공동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약 2천명의 정기-비정기 회원들이 꾸준히 후원을 하고 계십니다. 오히려 기부액이 모자랄까봐 걱정하며 더 기부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기업의 기부는 조금 위축된 분위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 기부에 대해 마음만 있고, 실천을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기부를 시작하는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지금 당장` 하는 것입니다. `내년 1월부터 하겠다`고 미루기 보다는,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곳에 `작지만 아름다운` 도움을 실천해 주십시오. 자신이 받는 봉급의 1% 정도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달에 100만원을 벌면 1만원을 내는 것이지요. 기부를 할 때에는 기부금액을 투명하게 운영하고, 자신이 낸 기부액이 어디에 사용되는 지 피드백을 해주는 곳을 선택해야 합니다.
꼭 돈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시간이나 재능을 기부할 수도 있습니다. 미대생이라면 도움이 필요한 시설이나 장소에 재밌는 그림이나 벽화를 그려줘도 좋고, 치과의사 선생님이라면 하루 반나절 정도 나와서 진료를 해주는 것도 좋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 음악, 마술 공연 등을 해주는 것도 좋습니다.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기부해 주세요.
- 재활지원 사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을 위해 `장애`와 `기부`에 대해 설명을 해주신다면.
`장애`는 조금 느리고 불편한 것이지 절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한 곳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가 존중해야 하는 것이지요.
`기부`는 `자신이 더 도움을 받는 행위`입니다. 어려운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 덕은 몇 배가 되어 자신과 후대에 이어질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셈할 수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더 크게 자신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돈 기부 업`(Don`t give up)해야 합니다. 삶을 포기하지 않고 희망차게 살아가고, 좀 더 많은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 `구텐백`의 2011년 소망은 무엇입니까.
푸르메재단이 잘 성장하고 어린이재활센터가 성공리에 잘 운영돼 경제적으로 어려운 많은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는 것입니다. 푸르메재단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훌륭한 전문경영자가 계신다면 지금이라도 영입하고 싶습니다. 몇 년 후 저는 자원봉사를 하거나 책을 쓰고 싶습니다. 평소 좋아하는 맥주와 관심이 많은 서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지난 2008년에 펴냈던 ‘장애인 천국을 가다’에 이어 선진화된 외국의 사회복지시설, 프로그램, 서구의 복지정책 등에 관한 글도 쓰고 싶습니다.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는 서울 영동고교와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CBS, 한겨레신문,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다. 재활병원 건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난 2002년 국내 최초로 하우스 맥주를 생산하는 ‘옥토버훼스트’를 세워 운영했다. 연세 사회봉사대상을 수상했으며 동아일보에 의해 2020년을 빛낼 100인에 선정됐다. 저서로는 ‘사는게 맛있다’(2005), ‘장애인 천국을 가다’(2008), ‘네가 있어 다행이야’(2008)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꼬마마녀’(2005), ‘꼬마유령’(200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