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미(이은미여성한의원 원장)
비행기 조종사인 남편과 이제 두 살 박이 아들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Y 씨. 그녀도 한때 지나가는 아이만 보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보던 불임녀였다.
유명한 병원이란 병원은 다 다녀보고, 온갖 정밀 검사를 해 봐도 자궁이나 난소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결과뿐.
“불임 6년 만에 남은 건 허탈함과 한숨뿐이네요.” 이렇게 말하며 쓸쓸하게 웃던 그녀. 이젠 거의 포기하는 심정으로, 뒤늦게 들어간 대학원 생물학과 실험실에서 쥐들과 씨름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가 임신에 성공할 수 있으려면 일단 자궁과 몸이 튼튼한지 어떤지를 살펴보고, 그녀의 난자와 남편의 정자가 모두 건강한지를 살펴봐야 한다.
진찰을 해 보니 예상했던 대로 그녀의 손발과 아랫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궁의 맥이 허(虛)하고 혈허(血虛: 피가 부족함)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자궁이 차고 허하면 당연히 자궁의 기혈 순환에 장애가 와서 혈액이 맺히는 어혈 증상이 생기는 법.
그녀의 배란은 그런 대로 정상이었지만, 예전에 병원에서 검사한 결과로 봐서 그녀 남편은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정충의 수가 부족하고 정자의 운동성이 떨어져 사정을 해도 정자가 난자를 만날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것이다.
게다가 이들 부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내의 배란기에 맞춰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렵다는 것. 남편이 파일럿이라 한 번 비행을 나가면 며칠씩 집에 못 들어오는데다, 아내의 배란기에 맞추어 비행 일정을 조정할 형편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튼 고루고루 나쁜 조건은 다 구비하고 있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한의학에서는 여성의 자궁을 밭으로 비유한다. 기본적으로는 남자의 씨와 여자의 씨가 충실해야 하고, 그 씨들이 서로 만나 뿌리를 내리고 자라날 밭이 비옥해야 제대로 싹이 트는 법이다. 임신이란 밭에 씨를 뿌려 그 씨가 발아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만약 밭이 비옥하지 못하고 척박하다면 아무리 충실한 씨라 할지라도 싹이 틀 수 없고, 또 밭은 비옥한데 씨가 너무 부실하면 역시 싹이 틀 수 없다. Y씨 부부의 경우는 밭도 얼음처럼 차고 척박한데다, 남편의 씨 또한 부실해서 싹을 틔우기에는 최악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은 남편이 비행중이라 그녀의 몸 상태부터 먼저 고치기로 했다. 치료기간을 8주로 잡고 자궁의 어혈을 풀어주면서 자궁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기능을 회복시키는 한약을 처방했다. 자궁이 따뜻해지면 손발도 저절로 따뜻해지는 법. 몸이 전체적으로 따뜻해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약침으로 신장과 자궁의 기능을 보강해주고 배꼽 주위의 주요 혈들에 뜸을 처방했다. 혈액 순환을 개선하기 위하여 혈관 레이저 치료와 아로마 오일 마사지, 치료보조 경락마사지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여 그녀의 자궁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호흡을 맞춰 노력한 결과, 3주가 지나면서 그녀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온 몸의 혈색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며, 치료를 시작한 지 4주째에 찾아온 생리 때는 생리통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무척 좋아했다.
이는 마침내 자궁의 어혈이 풀리면서 기혈(氣血)의 순환이 정상 궤도를 찾았다는 증거였다.
5주 째 되는 날, 그녀는 비행에서 돌아온 남편과 함께 나타났다.
“아내의 손이 예전보다 많이 따뜻해진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며 흐뭇해하는 그녀 남편을 진찰해 보니, 역시 신장의 양기가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 두 사람과 이들의 2세를 위해 좋은 약만 골라 처방했다. 그리고 이들 부부에게 임신 가능한 날짜를 잡아주었다.
그 결과 몇 달 뒤, “원장님, 임신이래요! 정말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울부짖는 Y씨의 목소리. 전화선을 타고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 받으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는 것, 그것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건 아주 보람 있는 일이다.
나는 한의학의 기본인 음양(陰陽: 음기와 양기, 여자의 기운과 남자의 기운)과 부정거사(扶正祛邪: 좋은 기운을 도와서 나쁜 기운을 몰아낸다)의 기본 이론에 충실했던 것뿐이다. 한데 이것만으로도 그 두 사람의 인생을 새 생명의 빛으로 가득 차게 해 줄 수 있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행복해진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로서 바로 이런 순간에 희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학문 중에서 ‘한의학’을 택한 보람을 그때처럼 진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여성은 조경(調經 : 생리를 고르게 조절함), 남성은 양정(養精 : 정기를 기르고 양생함).” 이것은 단지 임신 비법만이 아니다. 아프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생활 속에 있다는 사실, 꼭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