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당뇨병 치료의 최고 명의로 손꼽히는 허갑범 연세의대 명예교수(74, 사진). 그는 은퇴 후, 당뇨병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2002년 신촌에 당뇨병 전문센터인 `허갑범 의원`을 세웠다. 지금도 그는 그곳에서 환자들의 얼굴을 보며 진료를 하고 있다.
처음 허 교수의 진찰을 받으러 가는 환자들은 긴장하기도 한다. 두둑한 뱃살 때문에 꾸중을 듣지 않을까 해서다. 그는 대사증후군을 만병의 근원으로 보고 있다. 특히, 복부비만(내장비만)은 대사증후군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지적한다.
대사증후군은 허리둘레가 남자 85㎝, 여자 80㎝ (대한비만학회 남자 90㎝, 여자 85㎝)이상 이면서 ▲혈액 내 중성지방이 150㎎/㎗ 이상의 고지혈증 ▲고밀도 리포 단백질(HDL) 콜레스테롤이 남자 40㎎/㎗, 여자 50㎎/㎗ 이하인 경우 ▲혈압이 130/85㎜Hg 이상인 고혈압 ▲공복혈당 100㎎/㎗ 이상 또는 당뇨병 병력, 당뇨병약 복용 등의 조건 중 2가지 이상에 해당되는 경우를 말한다.
하지만, 그는 친절한 의사다. 배가 나온 사람들을 보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줄자로 허리둘레를 재어 준다. 그러고 나서 "90cm입니다. 모르고 계셨죠? 꼭 기억하시고 항상 체크 하세요. 물론 건강을 위해서 빼는 것이 가장 좋구요"라고 웃으며 말해준다.
그러나 의학자인 그는 계속 늘어나는 대사증후군 환자들이 걱정스러웠다.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만나면서 느낀 대사증후군의 위험성을 진료실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국내 대사증후군 환자는 1천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요. 특히 30세 이상 인구에서 3명 중 1명은 대사증훈군 앓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한 해동안 대사증후군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400만명, 진료비는 6천282억원이나 됐죠."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허 회장은 대사증후군의 예방과 조기 관리, 대책을 마련하고, 정부 정책도 지원할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지난해 10월 한국대사증후군포럼(이하 대사증후군포럼)을 창립했다.
을지의대 을지병원 이홍규 교수와 광동제일병원 신현호 교수가 부회장을, 연세대 보건대학원 지선하 교수와 이화의대 신경과 김용재 교수, 성신여대 식품영양학과 이명숙 교수, 고려의대 예방의학과 윤석준 교수 등이 이사를 맡아 다양한 분야의 의학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회원은 30여명 정도다.
"지난달 27일 처음으로 `대사증후군의 현황과 관리전략`이라는 주제로 서울역 글로리 대회의실에서 토론회를 열었어요. 이날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해를 `국민뱃살줄이기의 해`로 선포하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직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는 상황이지만, 꾸준히 홍보 활동을 하면, 충분히 국민과 국가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대사증후군 알리기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은 그의 평생 신념인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운동으로 많은 국민들이 건강해지길 바란다.
허 회장은 대사증후군에 취약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팔, 다리는 얇고 배만 불룩 나온 사람들이다. 그는 이들을 `거미형 비만`이라고 부른다
"뱃가죽이 얇으면서 내장지방이 많고, 팔다리가 가는 사람들은 대사증후군 위험이 아주 높습니다. 한국인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체형이 달라졌어요. 1970년대 이전 사람들은 뱃가죽이 얇아요. 1970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체중이 불면 얇은 뱃가죽이 늘어나지 않고 뱃속에 기름이 끼게 됩니다. 심하면 지방간이 되고, 심장 주위도 지방이 축적 됩니다. 심지어 근육에도 기름이 끼구요. 이를 `이소성지방축적`이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체형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한국처럼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는 그 정도가 심합니다. 보릿고개를 겪었던 세대에서 패스트푸드를 먹는 세대로 바뀌었으니까요. 그래서 40대 이상인 사람들은 체중이 3~4kg만 늘어나더라도 내장비만을 일으켜 대사증후군으로 이어질 위험이 높아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반면, 1970년대 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뱃가죽이 두껍기 때문에 살이 찌더라도 피하지방이 늘어나고 내장지방의 축적은 덜합니다."
그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치의였을 때도 뱃살 빼기를 강조했다고 말한다.
"사실 돌아가신 김 전 대통령도 배가 꽤 크셨어요. 그래서 식사조절과 운동을 강조했죠. 술, 담배를 안하셨으니까요. 한쪽 고관절이 좋지 않아 운동을 많이 하시기 어려워 청와대 실내 수영장에서 물안에서 걷는 운동을 추천해드렸죠. 중국음식을 좋아하셨는데, 단 음식, 기름진 음식이 좋지 않아 줄이도록 했습니다. 당시 허리둘레를 10cm정도를 줄이셨어요. 85세 때 폐렴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가지도 심혈관질환은 없으셨어요. 복부비만을 줄인 것이 크게 도움이 되신 것으로 생각해요."
그래서 그는 올해를 `국민뱃살줄이기의 해`로 삼고 국민들에게 복부 비만을 줄이고, 대사증후군을 예방토록 홍보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예금에는 단기 예금과 장기 예금이 있잖아요? 지방을 예금에 비유한다면, 복부지방은 단기 예금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짧은 기간에 비교적 쉽게 빠지고 찌죠. 하지만, 뱃가죽이라 부르는 피하지방은 달라요. 장기예금에 해당해요. 운동을 해도 쉽게 빠지지 않죠. 결국, 뱃살 빼기를 결심하고 요령을 알면 3~6개월 정도면 뺄 수 있어요. 물론 꾸준히 유지해야 하구요."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허리 둘레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올바른 방법으로 허리 둘레를 재는 행동이 습관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허리둘레는 바지 치수가 아닙니다. 배꼽 위 2~3cm에서 줄자를 이용하여 수평으로 잰 수치를 말하죠. 서양에서는 남자의 경우 94~102cm 이하, 여자의 경우 80~88cm 이하를 정상 범위라고 하는데, 아시아의 경우에는 남자 85cm, 여자 80cm가 권고됩니다. 예전에는 컴퓨터 단층 촬영장치를 활용해 내장지방을 촬영해야만 복부 지방의 양을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초음파를 이용해서 편리하게 측정하고 있습니다. 제 허리둘레는 85cm에요. 정상범위이긴 하지만, 식사 조절과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뱃살 빼기를 실천하고 있어요.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와 토마토 주스, 발효유를 먹고요. 점심은 남들처럼 먹지만, 저녁은 밥 반공기에 고기나 생선을 소량 먹고 채소를 많이 먹으려고 노력합니다. 또 만보계를 차고 하루에 6~8천보 정도를 매일 걷고 있어요. 계단을 걷거나 출근할 때도 걸으려고 노력하고, 오전 진료 후에는 꼭 신촌 일대를 한바퀴 돌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뱃살을 빼라고 해 놓고 제가 실천하지 않으면 안되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결심만 한다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대사증후군을 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건 대사증후군의 짧은 역사 때문입니다. 저도 1988년 6월 미국 당뇨병학회에서 `X 증후군`이라는 주제로 스탠포드 대학 리븐 교수의 특강을 처음 듣고 알게 됐죠. 그는 당뇨병의 최고 권위자였기 때문에 당장 찾아가 들었어요. 왜 대사증후군을 `X 증후군`이라고 불렀냐면 그 때 당시에도 그 정체가 잘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그는 인슐린저항성이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등 생활습관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들은 밝혀 냈지요. 그러나 그는 복부비만과 대사증후군과의 연관성은 밝혀내진 못한 상태였어요. 하지만, 그 강연은 제가 환자를 진료하면서 항상 지녔던 궁금증을 풀리게 하는 열쇠같았어요. 그 후, 수많은 연구 논문이 발표됐고, 1999년 세계보건기구는 이들 질환 (X증후군, 인슐린 저항성 증후군)을 대사증후군이라고 통일을 했지요."
대사증후군이 간과돼 온 것은 뚜렷한 자각 증상이나 통증이 없는 탓도 있다.
"혈압이나 혈당이 조금 올라가지만 고혈압이나 당뇨병의 진단 수준 이하이기 때문에 경시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를 방치하면 결국 제2형(성인) 당뇨병을 유발하고, 뇌혈관에 동맥경화증을 일으켜요. 심하면 뇌경색(중풍)이 오고요. 또 심장의 관상동맥에 영향을 미쳐 협심증, 심근경색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초기에 관리하면 예방할 수 있었던 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사망하거나 반신불수가 되는 극한 상황까지 가게 되는 것이죠."
이 때문에 그는 대사증후군의 치료, 예방법에 대한 조기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지금까지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혈전증, 동맥경화증 등 다양한 생활습관병은 각각의 질병을 따로 떼어서 치료를 해왔어요. 나무로 치면 가지들이죠. 그러나 이들 질병은 대부분 인슐린 저항성 유무에 따라 발병이 결정됩니다. 복부비만, 스트레스, 출산 시 저체중, 과음-과식, 운동 부족 등이 원인이 돼 결국 나무의 뿌리인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그 뿌리를 없애는 데 집중해야 해요. 물론, 환자들은 혈당과 혈압이 떨어지는 것들을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질병이 아닌,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치료하는데 힘써야 해요. 또 이러한 사실들은 어렸을 때부터 인식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영등포의 한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바 출산시에 저체중이었던 학생들이 정상 체중이었던 학생들보다 대사증후군의 위험에 더 노출되어 있는 것으로 나왔어요."
허 회장은 국민건강에 대한 국가의 책임도 강조했다. 종합검진을 할 때 허리 둘레를 재게 하고, 인슐린저항성에 대한 진단과 관리를 반드시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사증후군을 관리하면 의료비를 줄여, 결국 건강보험 재정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사증후군 관리가 의료비 절감 효과가 있다는 결과가 이미 일본에서 입증됐어요. 2008년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대사증후군 관리를 통해 불과 1년만에 1천억엔(1조2천억원)정도의 의료비를 료비를 절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일본과 같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