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신작로의 코스모스가 생각나기도 하고 추수를 앞 둔 들녘에서 부는 바람이 일으키는 황금빛 물결이 떠오르기도 한다. 호젓한 산길을 걷다가 목덜미를 스치는 차가운 바람에 화들짝 사색에서 빠져나오기도 한다.
날씨가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 쓸쓸함을 품은 찬바람이 정신을 깨우는 가을은 걷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98일 만에 만들어 낸 대역사(大役事), 서울 성곽
최근 걷기 열풍에 가장 각광받는 곳이 있다면 단연 제주의 올레길과 지리산의 둘레길일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 먼 제주와 지리산은 마음 내킨다고 쉽게 다녀올 만한 곳은 아니다. 주말에 가볍게 다녀올 만한 걷기 코스가 최근 조성돼, 시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바로 서울 성곽길 이다.
서울 성곽은 조선 태조 4년(1395)에 쌓아 올린 성으로 산은 돌로 쌓았고 평지는 흙으로 만들었다. 성곽에는 4대문인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4소문인 홍화문, 광희문, 창의문, 소덕문을 만들었다.
세종 4년(1422)과 숙종 30년(1704)에 보수가 이루어졌는데 길을 걷다보면 처음 태조 때 쌓아올린 곳과 세종 때 그리고 숙종 때 보수한 구간은 확연히 그 차이가 드러난다.
놀라운 점은 태조 때 성벽을 쌓을 당시 약 32만 명이 동원되어 성벽을 완성시키기까지 100일이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선택한 코스는 숙정문(⑦)에서 창의문(①)까지의 구간으로 ‘1. 21 사태’ 이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2007년 개방됐다. 얼마 전 오락 프로그램에 소개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안국역 2번 출구에서 마을버스(2번)를 타고 성균관대학교 후문에서 내리면 와룡공원 쉼터가 나오는데 거기서 부터가 시작이다. 길은 완만하게 이어져 있어 걷기에는 무리가 없다. 곡장을 지나 북악산 정상인 백악마루까지의 길이 약간 가파르지만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다.
주의할 점은 문화재청이 만든 리플릿에 ‘노약자와 어린이는 창의문 안내소에서 출발하는 코스를 권장합니다’는 말만 믿고 갔다가는 얼마 걸어보지도 못하고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마주치는 굉장히 가파른 코스에 당황할 수 있다. 가벼운 걷기라고 부르기에는 이어지는 길의 경사가 만만치 않다. 이 점은 백악마루(③)부터 마주치는 탐방객들의 표정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건축 실명제, ‘정영도’는 낙서꾼
와룡공원(⑨)을 출발해 부암동 방향으로 가다보면 가장 처음 마주치는 곳이 바로 숙정문(⑦)이다. 태조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어 언제나 문을 닫아두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음기가 센 곳이어서 문을 열어두면 도성안의 여인들이 바람이 날 것이라 해서 문을 닫아두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영 근거 없는 말은 아니어서 실제로 도성에 가뭄이 들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어 음기를 통하게 해 비가 오도록 빌었다고 한다.
숙정문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일제가 쇠말뚝을 박아두었다던 촛대바위(⑥)가 나온다. 그리고 조금 더 걸으면 곡장(⑤)이 나오는데 들어가면 성곽의 외벽이 한눈에 보인다. 방어와 공격을 위해 적이 오는 방향과 진세를 확인하기 위한 곳이기 때문이다.
곡장을 지나면 청운대로 가는 중간 코르크로 상처를 치료한 소나무가 나온다. 바로 1.21사태 때 무장공비들이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명 ‘1.21 사태 소나무’에는 그날의 상흔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나오는 곳이 바로 청운대(④)다. 가만히 앉아 서울 시내를 보며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다. 이곳에서는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데 카메라 촬영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걷다가 보면 간간이 성벽 가운데 무언가 기록해 놓은 바위들이 나타난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곳에는 성벽을 쌓아올린 시기와 그 구간의 책임자 이름, 그리고 그 구간을 맡아 부역을 나온 사람들의 고향이 적혀있다. 지금으로 치자면 실명제다. 건축물이 잘 못 됐을 때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돌들을 분석하면 구간별로 서울 성곽의 축성 시기를 가늠할 수 있다. 청운대에서도 하나가 보이는데 ‘정영도’라는 한글 이름이다. 그는 부역에 동원된 농민도, 축성을 감독한 사람도, 책임을 맡은 관료도 아니다.
이 낙서꾼은 문화재에 낙서한 죄로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이름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