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기운이 정수리를 쪼개고 들어오는 듯하다. 두려움이, 슬픔이, 어쩌면 분노가 그 창 너머로 전해진다. 사형장터 앞을 지켜선 미루나무에는 몇 명의 통곡이 스몄을까? 독립공원을 한바퀴 돌면서 마주치는 장소들이 가진 아픈 역사의 기억 때문이었을까..독립문에서 출발하는 길,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높은 담장과 망루가 주는 위압감은 옥사(獄舍) 앞에 서면 슬픔으로 바뀐다. 옥사를 지나 공원 한 구석에 있는 작은 건물(사형장)에는 그 첩첩이 쌓인 슬픔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 아픔을 뒤로하고 담장 너머 ‘이진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이진아’라는 이름이 모두에게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에게 책을 좋아하는 착한 딸이었으면 충분할 때도 있었다. 23살이 되기도 전인 2003년 어느 날, 그 딸은 하늘의 작은 별이 되어 아버지의 가슴에 묻혔다.
아버지 이창현씨는 딸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이 도서관을 지어 서울시에 기부했다.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특별한 사연이 있는 도서관이지만 입구에 고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제외하고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한 특별한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추모 보다는 도서관으로서 의미를 강조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도서관을 지나 독립공원 옆길을 따라 다시 지하철 독립문역으로 내려와 길을 건너 국사당(國師堂)으로 향했다. 독립문역 1번 출구로 나와 세란병원 뒤로 돌아 들어가면 인왕사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국사당은 인왕사의 일주문을 지나 5분가량 더 올라가면 도착한다.
국사당의 또 다른 이름은 목멱신사(木覓神祠). 태조 4년(1395)에 남산에 세워졌던 일종의 사당이다. 당시 조선 조정은 목멱산(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신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신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목멱신사를 세웠다.
하지만, 남산에 있어야 할 국사당은 현재 인왕산에 있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자신들의 신사(神社)를 세우면서 이곳으로 옮겨놨기 때문이다. 원래의 규모를 가늠할 길은 없지만 현재는 많은 절집들이 모여 있는 인왕산 자락에 그들의 일부인 양 초라하게 서있다.
때문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국사당은 그냥 지나치기 마련이다. 인왕사 일주문을 지나 오르다보면 양쪽에 작은 절집들이 늘어서 있고 오른쪽 골목으로 쭉 올라가면 선바위가 나온다. 국사당은 선바위를 오르기 전 마주치게 되는 마지막 건물이다.
국사당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중턱에 선바위와 만날 수 있다. 선바위에는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鄭道傳)과 무학(無學)대사의 일화가 남아있다. 태조는 이 바위를 성곽 안쪽에 둘 지, 아니면 바깥에 둘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성곽 조성 당시 안쪽에 이 바위를 둔다면 불교가 성할 것이고 밖에 둔다면 승려가 힘을 잃을 것으로 봤다. 때문에 선바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는 대립했다. 태조는 이 문제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꿈에 바위 안쪽으로 성을 쌓은 곳으로만 눈이 녹아있어 하늘의 뜻이라 여겨 안으로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조선 건국 일화에서 본 대로 선바위는 개인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과는 무관한데도, 무속인과 여인네들이 축원을 올리거나 소원을 비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선바위에서 다시 인왕사 일주문으로 내려와 왼쪽 길로 들어서서 조금 올라가면 서울 성곽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단군성전을 지나고, 사직(社稷)공원에 들어서면 사직단에 다다를 수 있다.
사직단은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궁궐과 종묘(宗廟)와 함께 만든 곳.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등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고, 사직단은 토지와 곡식의 신께 제사를 올리는 제단이었다. 때문에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일반인이 가까이 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이 사직단이 공원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역사극에서 ‘종묘사직이 무너진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일제는 말 그대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근간인 종묘와 사직을 뿌리째 흔들어 없앤 것이다. 현재 사직단은 매년 9월 셋째주 일요일 사직대제를 거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닫혀있다.
살아남은 한옥들, 그 골목 사이로
북촌을 보기 위해 사직단에서 경복궁을 지나 삼청동 쪽으로 향했다. 북촌은 원래 조선시대 왕족이나 고관대작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종로와 청계천 위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촌으로 불리며 가회동, 계동, 삼청동 일대로 당초 약 30여호의 한옥만이 있었다.
조그만 한옥들이 몰려있는 지금의 경관은 1930년대 서울의 행정경계가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 주택경영회사들은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해 그 자리에 중소 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했다. 가회동 11, 31, 33번지, 삼청동 35번지, 계동 135번지의 도시한옥주거지들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된 것들이다.
이곳의 번지수는 나름대로 당시의 상황을 전한다. 번지 뒤에 ‘-’가 붙은 것은 커다란 필지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건양사’라는 회사를 경영하며 집을 지어 분양했던 정세권 씨가 1935년 11월 삼천리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당시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경성부가 호경기를 맞이하여 1933년과 1934년 사이에 6,7천호의 주택이 신축되었으며 특히 1935년 이래로 서울의 북촌 일대는 어느 한곳 빈틈이라고는 없이 한옥이 지어지고 있다"며 당시 주택 건설 상황을 전했다.
사라진 집도 많지만 지금도 이곳의 한옥들은 그때의 모습을 간직한 채로 독특한 도시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곳에는 한옥뿐만 아니라 예쁜 카페나 독특한 박물관도 많다. 삼청공원을 지나 감사원으로 가는 중간 중간의 골목길은 그래서 쉬이 지나치지 못한다. 특별히 코스를 만들기 보다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골목골목 뒤지다 보면 전혀 뜻밖의 풍경과 마주치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글 유정우 기자 spica@watcherdaily.com 사진 최원우 기자 naxor@watcherdaily.com